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

이창호시대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을 꼽으라면 역시 신문, 방송 기자들일 것이다. 대국이 끝나고 무엇을 물어봐도 속시원히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목소리는 언제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전광석화 같은 행마로 천하를 평정해, 팬들을 매료시켰던 스승은 말 한마디 한마디조차 바람처럼 경쾌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승부에서도, 그 뒤의 소감에서도 돌부처와 같았다. 기자들의 푸념은 늘 한결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이거야, 원···”

그러나 사람들은 흙 속에 묻혔던 보석을 찾아내듯, 타고난 조심스러움과 환경에서 비롯된 어눌함 속에 감춰진 그의 미덕(美德)을 찾아냈다. 흙을 털어내고 요란하지 않은 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은, 서두르지 않는 이창호의 바둑에서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만 질주하는 현대사회 구조적 병폐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느림의 철학’을 발견했다. 입단 이후 20년 가까이 일관되게 지속돼온 이창호의 어눌한 언행은 ‘대지(大智)를 품은 대우(大愚)였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저널리스트들은 일제히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맞다. 이창호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일단, 표정이 밝아졌다. 여전히 부족한 듯하지만 예전보다는 웃는 얼굴을 많이 보여준다. 인터뷰의 목소리도 조금 커지고(아직 많이 작지만) 대화중에 전에는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조크가 간간이 섞이고 있다. 대화의 자신감이랄까,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창호는 달라진 것일까?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엄밀히 말하면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기보다 환경이 바뀌고 있으며 이창호는 그 흐름에 맞춰 왔을 뿐이라고 해야 옳다. 다시 말하면 이창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도 환경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속도로 적응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과 다르게 이창호 자신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려운가?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면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변화의 가장 큰 동인(動因)은, 정상의 세대교체다. 오랜 기간 그는 정상그룹에서 가장 어린 기사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최고의 실력자이면서도 그 권위에 어울리는 언행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타이틀전의 상대는 거의가 스승 조훈현이거나 대선배였고 승부는 대부분 그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운 성품을 지닌 그가, 패배의 멍에를 쓴 스승이나 대선배들에게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또 그 면전에서 쉽게 기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2004-04-06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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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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