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바둑의 창시자’ 우칭위안 100세로 영면

‘바둑 기성(棋聖)’으로 추앙받던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이 11월30일 오전1시 11분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100세. 영결식은 친족장으로 진행되며 후일 별도로 작별의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오다와라(小田原)시의 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우칭위안 선생은 지난 6월16일이 100세 탄생일이었다. 7월23일에는 요미우리(讀賣)신문사 주최의 백수(百壽) 축하연이 도쿄(東京)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요미우리 신문사 본사에서 별도로 열리기도 했다.

1914년 음력 5월 19일(양력으로는 1914년 6월 12일)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에서 태어난 우칭위안 선생은 바둑을 좋아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곱 살 때 바둑을 배웠고, 1928년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瀬越憲作․1889∼1972) 문하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바둑 수업을 시작했다.

1933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1975) 5단(당시)과 함께 ‘신포석(新布石)’을 발표했고, ‘흉내 바둑’, ‘3-三․화점․천원 착점’ 등 반상에서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하며 현대바둑의 기틀을 마련한 창시자로 존경받고 있다. 

특히 1939년부터 시작된 기타니 미노루 7단(당시)과의 치수고치기 십번기에서 승리하며 일본 바둑계 1인자에 올라섰고, 이후 1956년까지 이어진 가리가네 준이치(雁金準一), 후지사와 구라노스케(藤澤庫之助),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이와모토 가오루(岩本薰) 등과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도 잇달아 승리하며 일본 바둑계를 평정했다. 11차례 이어진 10번기 총 전적은 10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우칭위안 선생은 1984년 기사직을 은퇴했으며, 문하에 린하이펑(林海峰)․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을 두고 있다. [자료 | 한국기원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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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2. 3. 20:00




100세다. 바둑 하나로 20세기를 가로질러 21세기까지 그 영향력은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다. 6월16일 100세 생일을 맞이한 우칭위안(吳淸源, 오청원, 1914년 음력 5월19일 중국 푸젠성 출생, 본명은 吳泉)의 페이스북엔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중일을 비롯한 전세계 바둑인의 축하 메시지가 끊이지 않았다. 

일찍이 바둑계에서는 최고의 존경을 담아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란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붙였다. ‘바둑의 성인(聖人)’이라는 ‘기성’의 칭호는 그동안 일본 바둑계에서 슈사쿠(秀策·수책)와 도사쿠(道策·도책), 이 두 기사가 받았지만 모두 사후의 일이었다. ‘살아있는 기성’은 지금껏 우칭위안이 유일하다.

그의 인생은 현대바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느 분야에나 천재들이 있고 바둑계에도 많은 천재가 있었지만 그의 행마와 생각은 다른 어떤 천재들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우칭위안 전의 바둑과 후의 바둑이 있을 뿐이다’란 말이 나올 정도다. 

100년의 인생이다. 큰승부와 피를 말릴 만한 상황도 꽤 많았지만 우칭위안의 상징성이 강한 2판의 바둑 배경과 20세기 바둑의 전설이 된 ‘십번기’로 간추려 그의 100세 인생을 간략히 살펴본다.


○● 덤의 발견
1938년 일본기원이 ‘덤’을 도입하기 이전엔 모든 바둑은 덤 없는 바둑이었다. 정확히는 우칭위안이 특별히 흉내바둑의 파격을 선보이기 전까진 덤에 관한 규정의 필요성을 상상하지 못했다. 

덤을 기본규칙으로 한 오늘날의 ‘호선’ 바둑은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바둑을 ‘가문의 직업’으로 여기던 일본에서 공식대국은 치수제였다. 덤이 없는 호선(互先 흑백을 교대로 잡음), 선상선(先相先 흑2번 백1번), 정선(定先 흑만 잡음), 선이선(先二先 흑2번 두점치수1번)과 같은 치수제로 실력의 높고 낮음을 나눴다. 4판 이상의 승수차이가 나면 치수를 바꿨는데 이런 식의 치수고치기를 ‘쟁기(爭棋)’라고 했다. ‘선(先)’은 덤 없이 흑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우칭위안의 상상력은 덤없는 바둑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소년 우칭위안은 ‘괴동환(怪童丸)’이라 불리며 동시대 일본바둑의 촉망받는 인재이자 바둑 선배였던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1909년~1975년)를 상대로 자신의 발상을 시험한다. 

▼ 1929년 6월 3일~25일 신문게재 
시사신보 주최 吳소년출세기 제7국
치수 : 선상선 /282수 백3집승 (100수 이후 수줄임)
●우칭위안 3단 ○기타니미노루 4단



1928년 가을, 14세의 바둑신동 우칭위안은 어머니 서문(舒文), 맏형 완(浣)과 일본에 왔다.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와 일본 바둑계인물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우칭위안은 독학을 통해 13세에 일본 중견프로와 선으로 동등하게 둘 수 있었다. 1929년에는 4단들을 선으로 연파해 드디어 괴동환 기타니 미노루와 숙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때 엄숙한 승부를 기대하던 기타니는 흉내바둑을 보고 큰 모욕감을 느낀다. 이 바둑은 덤의 부담이 없는 흑(우칭위안)이 중앙 천원에 첫수를 두고 나머지를 백과 똑같이 대칭되는 점에 따라두는 흉내바둑이었다. 덤이 없다면 흑은 언제나 이 수법을 통해 어떤 상대든 편하게 상대할 수 있다. 바둑판의 좌표는 상하좌우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교대로 한수씩 두므로 언제든 그 대칭을 둘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우칭위안은 이때부터 중앙의 가치, 혹은 전체 바둑의 균형을 위주로 한 포석과 정석의 활용에 대한 ‘신포석’을 나름 구체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칭위안의 흉내바둑은 이후 ‘덤’이란 개념과 룰을 도입하게 한 촉매제가 되었다. 덤이 있는 현대바둑은 그 이전 덤이 없는 치수제 바둑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길을 걷게 된다.

○● 신포석
귀에서 변, 변에서 중앙으로 발전한다. 바둑의 논리다. 물론 타당하다. ‘신포석’은 이런 이론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우칭위안은 ‘전체의 균형’, ‘조화’를 중시하는 좀 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신포석이다. 신포석은 1933년 기타니 미노루와 우칭위안이 함께 제기했다. 야스나가 하지메(安永一)가 글로써 두 사람의 생각을 담았다. 세 사람의 공저가 된 [바둑혁명, 신포석]은 당시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야스나가의 시니컬한 ‘글빨’이 바둑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바둑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신포석과 바둑혁명’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말이다. 

▼ ○본인방 슈사이(秀哉) 명인 ● 우칭위안 5단
슈사이 명인 환갑기념대국, 제한시간 24시간, 정선
1933년 10월 16일 시작 ~ 14차 34년 1월 29일 종료, 백2집승




▲ 슈사이는 구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나이는 59세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슈사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포석에 대해 비판적인 대립각을 세웠다. 이때 신세대 대표 우칭위안은 21세였다.

대국은 1933년 10월, 도쿄의 한 여관에서 열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조차 한 대국 규칙이 적용됐다. 각자 사용할 수 있는 제한시간은 무려 24시간. 제한시간이 워낙 길어 바둑은 여러날에 걸쳐 둬야 했다. 따라서 누군가 중간에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해야 하는데, 그 권리는 명인에게만 있었다. 우칭위안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대국은 엄청난 화제가 됐다. 대국 자체도 화젯거리였지만, 우칭위안이 명인을 상대로 첫수 3·3, 다음 화점, 그리고 바둑판 한가운데 점인 천원에 두는 신포석법을 들고나왔기 때문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명인으로 상징되는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중일전쟁 중이라 민감한 상황.

명인의 제자들이 “명인에 대한 예가 아니다”라며 흥분했고, 심지어 우칭위안의 집에 돌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 바둑은 무려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끝났다. 중간에 중단된 횟수만 14차례였다. 결과는 명인의 2집승. 이것으로 신구 1라운드는 구세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양형모


신포석의 ‘상징’이 된 사건은 일본의 마지막 바둑명인, 슈사이 명인의 환갑기념 대국이다. 기념대국에서 우칭위안은 3·三과 화점, 천원을 차례로 놓는 신포석을 시도했는데, 3·三을 포함한 이런 수법들은 당시 소목중심의 일본바둑에서 ‘금기’의 수였다. 최병준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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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6. 18. 12:30




피의 승부 ‘이세돌-구리 10번기’가 다가온다. 

1930~50년대 일본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기성 우칭위엔 9단의 10번기는 유명하다. 지는 쪽은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10번기는 잔혹한 무대다. 

○● (관련기사) "이세돌-구리 10번기 분석" ☜ 클릭

26일 중국 베이징 킹위엔루이팅 호텔에서 이세돌-구리 10번기 제1국이 시작된다. 과거의 10번기와 다르게 치수고치기는 없고 점수로만 겨룬다. 6승을 먼저 하면 이기며, 비기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중략)




이번 10번기는 치수고치기가 없는 만큼 과거 우칭위엔 시절이 10번기와는 치열함에서 차원이 다르다는 시각도 있다. 

김성룡 9단은 "이번 이세돌-구리 10번기는 무승부가 가능하고 치수고치기가 들어 있지 않아 우칭위엔 10번기 등 과거의 10번기에 있었던 치열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이번 10번기는 그것이 가진 상징적 이름만 따온 것으로, 최하 6판을 보장하면서 혹시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릴 경우, 많은 돈을 들였음에도 판수가 적어지고 흥행이 떨어지는 위험을 없애려는 후원사 몽백합 쪽의 고도의 계산이 깔렸다."고 말한다. 

과거 10번기 못지 않게 치열할 것이란 의견도 있다. 

박치문 위원은 "관전자 입장에선 치수고치기가 없고 무승부가 존재한다는 점이 김이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은 한중의 천재기사이자 양국을 대표하는 간판급 기사들로 이들에게는 생애 마지막 큰 승부일 수 있는 대회다. 게다가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는 이 마당에, 두 기사는 마지막 영웅으로서 사력을 다해 열흘 간격으로 무관을 탈출하면서 10번기의 무게감도 더해졌다. 역사는 이 대회의 승자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0번기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긴 제한시간은 이세돌 9단에게 유리하지만 대국 장소가 대부분 중국이라는 점은 이세돌에게 불리하다. 우리나라 프로기사 대부분은 6-4로 이세돌 9단이 이기거나 5-5로 비길 것이라고 예상한다. 큰 승부에서 이세돌의 담력을 뛰어넘을 자는 없다는 게 대개의 이유이며, 일방적인 스코어가 아닌 것은 두 기사의 과거 전적에서 단 한 번도 일방적인 연승, 연패가 나온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수광  201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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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24. 20:14


▲ 이세돌-구리의 결승대결은 언제나 최고의 관심을 모았다.


최근 바둑계를 뒤흔든 화제가 있었다. 몇 번이나 성사되지 못했던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가 이번에는 현실이 될 수 있다. 바둑팬들은 완전 흥분상태다. 승자 500만 위안(한화 약 9억 2천만원)의 상금과 패자 20만 위안(한화 약 3천 7백만원) 출전비용도 파격적이다. 현재 바둑계에 어느 대회가 이런 큰 상금을 내건 적이 있었나? 

10번기는 대국자에게 아주 자극적이다. 또 바둑팬과 심지어 일반인도 이번 대회에 큰 관심이 있어 그저 소식만으로도 다른 세계대회보다 영향력이 컸다. 지난 세기 30~40년 대에 일본에서 벌어진 10번기의 매력에 견줄만하다. 

'명예의 도박' 10번기

오청원은 타이틀전 우승은 없지만, 지난 세기 일본의 초일류고수와 10번기를 가져 치수를 고쳐놓았다. 이런 식의 10번기는 시간을 많이 소모하고, 패배한 기사에게는 상처가 아주 컸다. 시대상황에 따라 10번기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당시 39세의 여자바둑 일인자 루이나이웨이와 19살 박지은의 치수고치기 이벤트대국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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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IN  2013-07-18  

by orobadukad 2014. 1. 1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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