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브라운관에 선보이게 될 신인 바둑캐스터 김수연, 홍준리, 이유민. (왼쪽부터)



이 기사는 [월간바둑] 김정민 기자가 4월호 <이 사람!>에 소개한 내용입니다. 바둑TV에서 오디션을 통해 뽑은 3인의 신인 캐스터를 미리 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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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계 구성원을 살펴보면 어느 곳이든 남성이 주류를 이루는데 반해 딱 한 분야,여성이 중심으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는 곳이 있다. 바로 ‘바둑TV의 꽃, 바둑캐스터’다.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한국기원으로 적을 옮기며 우여곡절이 많았던 바둑TV도 봄을 맞이해 파릇파릇한 신인 캐스터 선발을 마쳤다.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한 이들은 밤늦게까지 이뤄지는 방송수업을 받으며 브리운관에 서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과연 올봄 어떤 신인이 바둑팬틀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지. 재기와 미모를 겸비한 3인의 여성 캐스터를 만났다.

-먼저 바둑팬들에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다함께) 안녕하세요. 앞으로 바둑TV의 즐거움을 책임질 신인 바둑캐스터 김수연(23), 홍준리 (21), 이유민(23)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웃음).

-오디션 경쟁 매우 치열했다고 들었는데요.

(수연) 맞아요. 오디션장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지원자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아예 주위사람들은 다 옆집 아저씨(?)라고 생각하며 마인드컨트롤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죠.

-경쟁자들을 ‘옆집 아저씨’로 생각할 수 있다니,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로 보여지는데요. 오디션을 통과한 나만의 비법 같은 게 있었나요?

(유민) 저는 오디션 보기 일주일 전부터 온종일 바둑리그를 보며 멘트를 쓰고 거울을 보며 연습했어요. 최유진, 이소용 캐스터를 보며 공부하고 실전처럼 모의면접을 연습하다보니 오디션에서 생각보다 안 떨고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아나운서와 MC를 했던 경험도 도움이 됐고요.

(준리) (속삭이듯) 유민 언니가 오디션 1등했어요. 진짜 잘해요.

(유민) 왜 그래~, 너도 잘했으면서.

▲ 오디션을 1등으로 통과한 이유민. 최유진, 이소용이 집권(?)하고 있는 바둑캐스터 분야에 새바람을 일으킬 기대주다.


▲ 바둑이 너무너무 좋아서~ 진짜 매력적이어서 진행 아르바이트도 마다않고 즐겁게 했다. 어려서부터 프로기사보다는 바둑캐스터를 선망했다니 이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준리) 저는 공부는 언니만큼 많이 못했지만 이상한 자신감이 있어요. 오직 내가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거? 이번에도 남이 한 걸 보지 않고 하려다가 결국 집에서 쫓겨났지 뭐예요. 학원에 좀 가라고(웃음). 억지로 학원에 가서 발성이랑 1분 스피치를 연습하긴 했는데요. 그래도 시험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치렀어요.

(기자) 예를 들면요?

(준리) “안녕하세요? 저는 바둑계 도라에몽이에요. 왜 도라에몽이냐고요? 제 매력을 언제 어디서든 다 꺼내드릴 수 있거든요." 이런 거? (일동웃음).

▲ 가장 나이가 어린 홍준리는 올해 한국바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일찍이 기재를 보여 한때 프로를 지망하기도 했으나 외교관인 아버지의 근무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중도에 꿈을 접어야했다. 외국에서도 바둑을 계속할 여건이었다면야 이어갔겠지만, 공교롭게도 아빠의 근무지가 바둑과는 거리가 먼 국가였다. 대신 원어민 버금가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갖췄다.


▲ 그렇다고 화초바둑이라고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지난해 내셔널리그에서 한국바둑고등학교 주전선수로 뛰었다.


-과연 세 분 다 범상치 않은(?) 능력의 소유자로 보이는데요. 바둑캐스터에 지원하게 된 동기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유민) 어려서 바둑을 시작할 때부터 바둑캐스터가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프로를 지망했지만 바둑캐스터를 선망했달까? 나레이션 영상도 직접 제작해 공모전에 참여해 보기도 했는데 한국농수산식품기업at Ucc 공모전 최우수상과 KB국민은행 Ucc 공모전 홍보영상 나레이션을 제가 직접 해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어요. 다 바둑캐스터가 되기 위한 연습이었죠.

(수연) 저는 바둑을 정말 좋아혜요. 프로를 지망해서가 아니라 진짜 바둑 자체를요. 그래서 바둑학과도 진학했고 바둑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해봤는데 교육이나 이런 쪽에서는 즐거움을 못 찾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바둑TV에서 계시 아르바이트를 해봤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방송의 향기랄까? 주목 받고 카메라에 압도 당하는 그 느낌(?)에 매료돼서 방송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해보니까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웃음).

-천성이 너~무 방송인스러운 세 분이신데요. 만약 방송을 하게 된다면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은 가요?

(준리) 혹시 ‘보니하니’란 프로그램 아세요? 저는 바둑도 그런 프로그램이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방식은 조금 다르더라도 맛깔나는(?) 그 느낌을 살려보고 싶어요. 또 실력은 탑인데 팬들이 잘 모르는 기사들 있잖아요. 그런 기사를 초대해서 명국을 놔보며 질문도 하고 장기자랑도 시키는 복합적인 프로그램도 해보고 싶고요.

(수연) 저는 토크식 방송이요. 프로기시들을 모셔놓고 ‘해피투게더’처럼 진행하는 거예요. 프로기사의 평소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제가 예전에 이창호 9단 성대모사를 한번 했더니 다들 빵 터지더라고요. 그 런 재미있는 방송을 해보고 싶어요.

(유민) 저는 바둑뉴스률 진행해보고 싶어요. 바둑계 소식을 팬들에게 재미있게 알려주는? 사실 토크쇼도 해보고 싶고 그런데 앞에서 다 얘기해서(웃음). 시청자들이 재미있어 할 프로그램은 가리지 않고 다 해보고 싶어요.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3인 3색의 신인 바둑캐스터들. 과연 어떤 캐스터가 시청자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올지 곧 바둑TV를 통해 만나보아요~. <인터뷰/ 월간바둑 김정민 기자>

▲ 김수연 역시 프로를 지망할 정도로 바둑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우연히 바둑TV에서 계시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그때 방송카메라에 압도 당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에 끌려 바둑캐스터를 꿈꾸기 시작했다.


▲ 바둑TV 계시원으로 활동할 때.


▲ 오디션을 통과했다고 신분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본무대에 서기까지 철저히 준비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박철민 아나운서에게 방송을 배우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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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7. 3. 31. 11:52


▲ 월간바둑 8월호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은 박지은 9단. 국내여자기사 최초로 500승을 달성했다.



정통바둑매거진 월간 『바둑』 8월호가 출간됐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은 박지은 9단. 국내여자기사 최초로 500승을 달성한 박지은의 소감과 근황을 담았다. 

또한 35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 대회, 각종 국내기전의 시상식 및 개막식과 프로기사 재능기부 등의 다양한 바둑계 소식을 영상화보로 전한다. 

특히 이번 호부터는 국가대표팀의 연구 결과를 안방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지난 5월 출범한 국가대표팀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주옥 같은 비기를 독자들에게 독점 공개한다.

또한 새롭게 신설된 실전사활 강좌와 프로들의 바둑에 실제 등장한 현현기경 사활, 영화 ‘신의 한수’ 뒷이야기 등이 실속과 재미를 함께 선사한다. 

이외에 <경운만필> 및 <엄민용기자의 돌하나 말하나>, <차민수 四단-다시 조명하는 그의 숨겨진 뒷이야기> <新기사열전> <기원순례> 등의 다양한 읽을거리와 <문용직의 수법>, <라이벌 뛰어넘기 프로젝트>, <고전사활산책>, <알쏭달송 바둑용어>, <도전! 아마단급> 등의 실속 강좌,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 <바민이의 좌충우돌 바둑입문기> <이시용의 4컷사진> 등의 다양한 내용을 실었다.

ebook.cyberoro.com


[자료협조 | 월간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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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7. 25. 10:27




100세다. 바둑 하나로 20세기를 가로질러 21세기까지 그 영향력은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다. 6월16일 100세 생일을 맞이한 우칭위안(吳淸源, 오청원, 1914년 음력 5월19일 중국 푸젠성 출생, 본명은 吳泉)의 페이스북엔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중일을 비롯한 전세계 바둑인의 축하 메시지가 끊이지 않았다. 

일찍이 바둑계에서는 최고의 존경을 담아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란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붙였다. ‘바둑의 성인(聖人)’이라는 ‘기성’의 칭호는 그동안 일본 바둑계에서 슈사쿠(秀策·수책)와 도사쿠(道策·도책), 이 두 기사가 받았지만 모두 사후의 일이었다. ‘살아있는 기성’은 지금껏 우칭위안이 유일하다.

그의 인생은 현대바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느 분야에나 천재들이 있고 바둑계에도 많은 천재가 있었지만 그의 행마와 생각은 다른 어떤 천재들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우칭위안 전의 바둑과 후의 바둑이 있을 뿐이다’란 말이 나올 정도다. 

100년의 인생이다. 큰승부와 피를 말릴 만한 상황도 꽤 많았지만 우칭위안의 상징성이 강한 2판의 바둑 배경과 20세기 바둑의 전설이 된 ‘십번기’로 간추려 그의 100세 인생을 간략히 살펴본다.


○● 덤의 발견
1938년 일본기원이 ‘덤’을 도입하기 이전엔 모든 바둑은 덤 없는 바둑이었다. 정확히는 우칭위안이 특별히 흉내바둑의 파격을 선보이기 전까진 덤에 관한 규정의 필요성을 상상하지 못했다. 

덤을 기본규칙으로 한 오늘날의 ‘호선’ 바둑은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바둑을 ‘가문의 직업’으로 여기던 일본에서 공식대국은 치수제였다. 덤이 없는 호선(互先 흑백을 교대로 잡음), 선상선(先相先 흑2번 백1번), 정선(定先 흑만 잡음), 선이선(先二先 흑2번 두점치수1번)과 같은 치수제로 실력의 높고 낮음을 나눴다. 4판 이상의 승수차이가 나면 치수를 바꿨는데 이런 식의 치수고치기를 ‘쟁기(爭棋)’라고 했다. ‘선(先)’은 덤 없이 흑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우칭위안의 상상력은 덤없는 바둑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소년 우칭위안은 ‘괴동환(怪童丸)’이라 불리며 동시대 일본바둑의 촉망받는 인재이자 바둑 선배였던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1909년~1975년)를 상대로 자신의 발상을 시험한다. 

▼ 1929년 6월 3일~25일 신문게재 
시사신보 주최 吳소년출세기 제7국
치수 : 선상선 /282수 백3집승 (100수 이후 수줄임)
●우칭위안 3단 ○기타니미노루 4단



1928년 가을, 14세의 바둑신동 우칭위안은 어머니 서문(舒文), 맏형 완(浣)과 일본에 왔다.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와 일본 바둑계인물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우칭위안은 독학을 통해 13세에 일본 중견프로와 선으로 동등하게 둘 수 있었다. 1929년에는 4단들을 선으로 연파해 드디어 괴동환 기타니 미노루와 숙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때 엄숙한 승부를 기대하던 기타니는 흉내바둑을 보고 큰 모욕감을 느낀다. 이 바둑은 덤의 부담이 없는 흑(우칭위안)이 중앙 천원에 첫수를 두고 나머지를 백과 똑같이 대칭되는 점에 따라두는 흉내바둑이었다. 덤이 없다면 흑은 언제나 이 수법을 통해 어떤 상대든 편하게 상대할 수 있다. 바둑판의 좌표는 상하좌우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교대로 한수씩 두므로 언제든 그 대칭을 둘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우칭위안은 이때부터 중앙의 가치, 혹은 전체 바둑의 균형을 위주로 한 포석과 정석의 활용에 대한 ‘신포석’을 나름 구체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칭위안의 흉내바둑은 이후 ‘덤’이란 개념과 룰을 도입하게 한 촉매제가 되었다. 덤이 있는 현대바둑은 그 이전 덤이 없는 치수제 바둑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길을 걷게 된다.

○● 신포석
귀에서 변, 변에서 중앙으로 발전한다. 바둑의 논리다. 물론 타당하다. ‘신포석’은 이런 이론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우칭위안은 ‘전체의 균형’, ‘조화’를 중시하는 좀 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신포석이다. 신포석은 1933년 기타니 미노루와 우칭위안이 함께 제기했다. 야스나가 하지메(安永一)가 글로써 두 사람의 생각을 담았다. 세 사람의 공저가 된 [바둑혁명, 신포석]은 당시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야스나가의 시니컬한 ‘글빨’이 바둑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바둑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신포석과 바둑혁명’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말이다. 

▼ ○본인방 슈사이(秀哉) 명인 ● 우칭위안 5단
슈사이 명인 환갑기념대국, 제한시간 24시간, 정선
1933년 10월 16일 시작 ~ 14차 34년 1월 29일 종료, 백2집승




▲ 슈사이는 구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나이는 59세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슈사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포석에 대해 비판적인 대립각을 세웠다. 이때 신세대 대표 우칭위안은 21세였다.

대국은 1933년 10월, 도쿄의 한 여관에서 열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조차 한 대국 규칙이 적용됐다. 각자 사용할 수 있는 제한시간은 무려 24시간. 제한시간이 워낙 길어 바둑은 여러날에 걸쳐 둬야 했다. 따라서 누군가 중간에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해야 하는데, 그 권리는 명인에게만 있었다. 우칭위안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대국은 엄청난 화제가 됐다. 대국 자체도 화젯거리였지만, 우칭위안이 명인을 상대로 첫수 3·3, 다음 화점, 그리고 바둑판 한가운데 점인 천원에 두는 신포석법을 들고나왔기 때문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명인으로 상징되는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중일전쟁 중이라 민감한 상황.

명인의 제자들이 “명인에 대한 예가 아니다”라며 흥분했고, 심지어 우칭위안의 집에 돌이 날아들기도 했다. 이 바둑은 무려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끝났다. 중간에 중단된 횟수만 14차례였다. 결과는 명인의 2집승. 이것으로 신구 1라운드는 구세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양형모


신포석의 ‘상징’이 된 사건은 일본의 마지막 바둑명인, 슈사이 명인의 환갑기념 대국이다. 기념대국에서 우칭위안은 3·三과 화점, 천원을 차례로 놓는 신포석을 시도했는데, 3·三을 포함한 이런 수법들은 당시 소목중심의 일본바둑에서 ‘금기’의 수였다. 최병준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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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6. 18. 12:30


▲ (96년) 안소장의 사무실 한켠엔 아직도 대학시절에 바둑대회에 나가 우승상품으로 받은 바둑판이 훈장처럼 자리잡고 있다


유력한 대선후보(
 2012-09-08 현재) 로 거론되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일찍이 바둑마니아로 소문났다. 정치적인 색깔을 떠나, 바둑을 좋아하는 유명인사로서 그의 바둑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바둑팬 또한 안원장의 '바둑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리라. 예전 기사이긴 하지만 [월간바둑]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기사는 바둑에 국한한 내용이었으나 '안철수의 생각' 일단을 살펴볼 면이 있기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 사람의 행마법(96년 11월)
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씨

글/정용진 편집장
사진/이시용기자, 안철수 바이러스연구소 제공


오늘날 지구상의 웬만한 것은 컴퓨터에 정복되었고 또 정복되고 있다. 체스는 이미 세계 최강자와 겨루는 수준에 이르렀고 장기도 머지않아 공략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바둑만큼은 아직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모를까 컴퓨터가 영원히 인간을 이길 수 없는 마지막 분야가 바둑일 것이라고 장담하기까지 한다.

컴퓨터의 두뇌는 0과 1의 이진수 조합으로 구동된다. 그런 의미에서 흑백의 이분법이 가능한 바둑과 유사한 면이 많다. 바둑과 컴퓨터는 지극히 수학적이라는 데에서 한 혈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원시적인 컴퓨터의 형태가 바로 '주판'이라고 일반상식 책에 서술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주판'은 원래 '바둑'에서 변형되어 나온 기구라는 사실을 여럿 고문헌에서 증명하고 있다는 점. 

(중략)

서울대 의과대학 예과 2학년 때 취미활동 개발차원에서 배우기로 작심한 품목이 바둑이었다. 본과에 진학하면 취미활동을 하고 싶어도 할 시간이 없다는 선배의 충고가 계기가 되었다. 정신수양의 의미도 곁들여 바둑을 두면서 어지러운 현실을 이겨볼까 생각한 것이다.

바둑은 사실 책으로 배우고 기원은 심심할 때 갔다. 안소장은 무엇이든 시작할 때 관련서적을 두루 사 이론부터 파고드는 성격이다. 그리고 책에서 배운 내용을 연습한다. 처음에는 행보가 더딜지 모르나 기초이론 무장이 단단하므로 종내에는 다른 사람보다 빠른 효과를 본다. 

바둑도 그랬다. 학기 중엔 청계천 고서점에서, 방학 중엔 고향 부산 구덕운동장 근처 고서점에서 눈에 띄는 바둑책은 죄다 손에 집었다. '월간 바둑'도 그때 만났다. 첫 길잡이가 된 입문서는 오타케(大竹英雄) 九단이 쓴 책이었다. 무작위로 산 책이 50권쯤 될 무렵 어렴풋이나마 모양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은 이때 비로소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10급에게 9점을 깔고도 100집 이상 져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으나 1년 만에 기원급수 2급까지 급행보를 보였다. 그때 기원급수 2급이면 지금 한국기원 심사기준으로 볼 때 아마 1~2단쯤 될 것이다. 당시 부산 한국기원 서면지원의 이기섭 사범이 듣기 좋은 소리로 무릎을 쳤다. 

"아깝다. 어릴 때 배웠으면 조훈현 못지 않을 기재인 것을..."

(중략)

함정수란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속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것 아닙니까. 상대가 함정수를 쓰지 않으면 사실 함정수를 알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함정수와 같은 컴퓨터 바이러스가 계속 출몰하는 한 그것을 찾아 연구하는 것은 저의 몫입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바이러스 퇴치와 같은 소모성 연구보다는 더욱 가치있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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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2. 12. 11:17


▲ 오성수 만평 중 하나, 이창호가 명인전,랭킹1위라는 두마리 토끼를 얻었다, 세번째 토끼는?



'호기심'이란 무엇일까?
단지 '이창호'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바둑만화와 바둑만평을 그리게 된 만화가가 한 명 있다. 무려 4년이상 아무런 보수없이 이창호 9단과 바둑을 그려왔으니까, 호기심이란게 어쩌면 사람을 움직이는 '정열'이나 '재미'같은 것과 본질적으로 통하나보다.

그 만화가의 별칭은 구자식(gajasik)'이며, '오성수'란 이름이 그 주인공의 실명이다. 바둑계와 이창호 팬클럽 '두터미'에선 오성수라는 실명보다 '구자식'이라는 예명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4년이상 '맹(!)'활약하다보니 바둑계 사람들도 그를 많이 알게 됐다. 직접 만나 알게 된 게 아니고, 그의 1컷 만화를 보면서 조금씩 입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중략)

상상력을 중심에 놓은, 관전 9단

- 바둑계의 많은 분들이 구자식 '오성수'화백을 알고 있다. 무척이나오래 이창호 9단을 대상으로 한 만화들을 그렸다. 원고료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텐데, 거의 4년이상(햇수로는 5년이상) 꾸준히 그려왔다. 
"많은 분들이 봐주셔서 감사하다. 내가 좋아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그릴 수 있었다. 초반에는 이창호화 비슷하지 않다고 팬클럽 회원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초기엔 주로 사진을 보고 그렸다. 팬클럽 미팅시 자주 만나보고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이창호 9단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 지금은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금방 그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다거나 하는 댓글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게됐다. 다른 프로기사들은 좀 더 쉽게 그릴 수 있었는데, 이창호는 (특징을 잡아) 그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자리에 동석한 손종수 이사(월간바둑 편집장)의 동감이 이어진다. "그럴거다. 이창호 9단은 특징이 많지는 않은 얼굴이다. 입꼬리가 살짝 처진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오래 보고 이미지를 익히지 않으면, 팬들이 보아온 이창호 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그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유명 프로기사들 그리기는 상대적으로 더 쉬었을 것이다"
오성수 화백은 2006년 팬클럽과의 인터뷰에서 "사범님의 특징을 제일 먼저 살피는데 눈썹이 강렬하시고, 눈은 약간 풀린 듯 하시고^^;, 코는 약간 크시고, 입은 항상 굳게 다무시고..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얼굴 윤곽이었는데, 광대뼈 부분이 포인트인 것 같다.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초기에는 솔직히 (자기의 그림이) 못마땅했는데 그리면서 조금씩 나아진 것 같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 만화는 언제부터, 만화가로서 이름을 알리는 것 자체가 프로기사가 성공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 것도 같다. 경쟁이 무척 치열한 분야 아닌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때부터 계속 그렸다. 부모님이 그림 그리는 걸 반대하진 않으셨기 때문에 만화를 계속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이게 수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직업으로 선택할 땐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취미로 할때와 직업으로 할때는 다른거니까.

최병준  20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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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2. 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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