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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복수”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 세상에 보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가? 복수를 주제로 한 어느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아마도 감독이 무시당하고 고독했나 보다, 뭔가 세상에 일을 저지르고 싶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세상의 무시와 버림에 대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복수가 인생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극복해야 할 대상(일본)을 정해놓고 매진했던 건 한국바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외수 선생의 글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아픔과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결론에선 "복수"의 모습이 잘 없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움의 느낌이라면, 복수를 꿈꿀 수도 있지 않았나?

“왜 없나, ‘들개’에도 세상에 복수를 하려는 주인공이 있다. 내 글을 읽고 감동을 하면 그게 충분한 복수가 된다. 작가의 복수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감동시키면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나를 외롭게 하던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화한다. 그것이 가장 통렬하고 유쾌한 복수다. 
어떤 시대든 그 시대의 현실은 ‘예술의 적‘이 된다. ,작가는 그 현실에 복수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동‘이다. 
내가 멋있게 살면 ‘예술도 글도 한번 해 볼 만하다‘고 사회통념이 변할 수 있지 않겠나. 씨트콤도 나가고, CF도 나가고 했다. MBC에서 하는 라디오방송(언중유쾌)은 대한민국 최초의 ’재택방송‘이자 ’가내수공품‘이다. 죽이지 않나? 누가 그런 걸 할 것인가, 예술에 있어 그런게 내 몫이라고 느낀다. 내가 총대를 메려 한다.“ 

- 친구가 대학시절 선생의 글에 심취했었다. 열렬한 팬이었다고 할까.. 그 친구 말이 선생의 수필을 보며 일제시대 '이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데. 

“초기 활동시기에 ‘이상의 망령’이 되 살아 났다‘ 문단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친구야, 네가 문학소년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 선생의 글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팍팍 후비며 파고든다. 별것도 아닌 평범해 보이는 사물을 아주 자세히 잘 관찰하고, 재밌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그런 능력이 탁월하다. 꿉꿉한 일상에 생명을 집어넣는다. 도대체 그런 감수성, 집요한 상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의도한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만물에 대한 애정이다. 그래야 딴 게 보인다. 그게 없으면 신선한 표현도 없다. 그런 애정이 생활화, 습관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만물에 의도적으로 말을 던지고 대화를 해야 한다. 바위에게 물어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들어라, 사물과의 합일감에 의해서 절묘한 표현이 나오게 된다. 바둑이 도(道)라고도 하지,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도를 닦는 것이다. 바둑에서 (프로가) 착점을 하는 것과 작가가 원고지에 글 한자, 한자를 박아 넣는 것은 같은 것이다.”

- ‘프로의 착점과 예술(문학)이 동등하다’는 의미인데, 프로들이 좋아할 표현인 것 같다. 바둑을 ‘예술의 경지’로 보시는 것인가?

“물론이다. (바둑은) 예술이다. 정말 오묘한 소설이고 시다. 바둑에서 보이는 발상의 비약을 봐라, 착수 하나에서 시적인 경지를 느낀다. 한판을 꾸려가는 그 구성력은 또 어떠한가. 난국을 타개하는 모습은 한편의 기가 막힌 소설이다. 난 바둑을 전투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나는 바둑을 감상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한다.”

최병준  200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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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24.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