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8일, 중국의 장쉔 8단이 분통을 터뜨렸다. 장쉔 8단은 중국 창하오 9단의 아내, 그녀가 화를 낸 것은 다름 아니라 인터넷 중계의 해설때문이었다. 

내 남편이 유리했단 말야 씨바남편인 창하오 9단이 이창호 9단과 제5회 춘란배 8강전을 두고 있었는데, 남편이 괜찮은 국면을 지속하고 있었음에도 중국의 인터넷 중계는 이창호 9단의 반면 10집이상 우세를 줄기차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창호 9단이 자칫하면 패배의 수렁으로 빠질만한 가능성이 의외로 높았던 상황, 끝까지 이창호 9단 우세를 외친 일부 중국 검토진들도 분명 계속 형세판단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래도 이창호 9단이 진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던 듯 하다. 

그런 현상은 중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한국에 더 먼저 있었을 것이다. 굳이 족보를 따져야 한다면 여기 훌륭한 증거가 있다. 그 판은 목진석 8단과 이창호 9단이 겨뤘던 제13기 기성전 도전3국.






2002년 2월 23일
제13기 현대 자동차배 기성전 도전3국 
○이창호 9단(棋聖) vs ●목진석 6단(도전자) 225수끝 흑불계승 


다음은 이창호 9단의 승리를 단언하고 있는 실시간 해설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창호 9단이 이리 저리 약한 곳을 헤집으며 막판 반전을 꾀하고 있었지만, 도전자 목진석 6단이 빈틈없이 대처하고 있었던 장면이었다. 해설은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져 반대로 이야기 되고 있었다.

- 이제는 해설의 의미가 없습니다
- 조용히 종국을 지켜보는 정도.
- 백이 많이 앞서 있습니다.
- 오늘 바둑은 '종반의 死神 이창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 한판입니다
- 수읽기와 계산력의 힘...
- 흑175의 단수를 불청하고 우상귀 백176으로 이은 장면은 정말 이창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명장면 같습니다
- 허무하네요.종반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신산의 영역 같습니다.
- 우상귀 응수타진 한방에...흑이 무너지네요.


불리하면 나도 던진다구이창호 9단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신뢰를 보여주는 마지막 해설이 한창 이어지는 도중 충격적인 현장소식이 전해졌다. 이창호 9단이 225수째에 더 버티지 못하고 돌을 던졌다는 것이다. 인터넷 해설진도 약간의 쇼크를 받았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저렇게 이창호 9단의 칭찬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돌을 던져 버리다니.... 대국을 지켜보던 팬들이나 도전자 목진석 6단에게도 무척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의 해설이 서툴렀다거나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이창호 9단을 그야말로 굳게 믿고 또 믿고 있었기에 빚어진 현상이다. 물론 이후에도 이창호 9단의 대국에선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이렇게 대국이 확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창호 9단이 불리했던 경우도 종종 있었던듯 하다.

2004-06-14 최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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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2. 27. 12:50


2004-01-29 최병준

이창호 9단의 책 읽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띤다.

확실하게 언제 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신문의 관전기나 칼럼에서 이창호 9단이 가지고 다니는 책이 언급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인터뷰에서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질문도 자주 나온다. 가끔씩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이창호 9단이 책 한권은 늘 옆에 끼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이창호 9단의 책읽는 모습은 이제 바둑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들 정도. 그만큼 이창호 9단이 약간만 시간이 있어도 책을 꺼내 들고 읽기 때문이다. 한국기원이나 바둑TV에 대국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하면 그 시간동안 책을 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동중에 잠시 틈만 나도 책을 보고 있다. 

어떤 책을 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그냥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본다'고 대답하는 이창호 9단. 소설책에서 역사관련서적까지 주 종류는 주로 인문교양쪽에 가깝고, 사자성어나 속담에 관한 서적도 많이 들고 다닌다.

실제로는 이창호 9단의 책읽기 습관을 옆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게 되니 약간 좀 과다한 느낌이 들 기도 한다. 그 어느곳에서라도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꺼내들기 때문이다. 이창호 9단의 활동에서 책읽기가 자리잡은 이유는 어떤 것일까? 그냥? 혹은 심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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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2. 27. 12:44


춘란배 결승2국 하루 전날인 15일 오후, 체단주보(體壇週報)의 시에루이 기자가 방으로 찾아왔다. 한국기원 기전사업팀 전재현 과장과 기자는 호수 쪽으로 면한 테라스 문을 열어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물론, 그와 나의 대화는 전재현 과장의 동시통역에 의한 것이다). 

시에루이 “내일 대국(결승2국)을 어떻게 보냐?”

기자 “무서워서 말 못하겠는데? 당신들은 기사를 사실과 다르게, 쓰고 싶은 대로 쓰잖아. 나중에 무슨 욕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쓴웃음을 짓게 한 ‘이창호, 지하실 거주 사건’에 대한 ‘뼈 있는’ 농담이다. 이창호 9단의 열렬한 추종자(?) 시에루이 기자와는 오래 전에 소개를 받아 얼굴이 익숙한 데다 여러 차례 취재현장에서 마주쳐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 이 정도 조크는 자연스럽게 오간다. 전 과장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시에루이 기자는 유쾌하게 웃었다. 다소 과장된 제스처로 말하는 기자의 표정에서, 조크가 무겁지 않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 사진 : 결승1국이 끝난 다음날, CCTV와 씨에루이 기자가 이창호 9단과 짤막히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서 있는 사람이 중국 체단주보의 씨에루이(謝銳) 기자.)

기자 “나는 이창호 9단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승1국도, 한때 저우허양 9단이 좋았던 적은 있지만 종반까지 이 9단이 승리할 기회가 더 많았다. 내용으로 봐서 이 9단의 대국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결승1국을 진 건 아쉽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이 9단이 아니다. 현재상태를 유지한다면 무난히 이길 것으로 생각한다.”

시에루이 “이창호 9단의 우승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2005-03-17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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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20. 11:04


이창호, 슬럼프도 권태기도 아니다!

상하이로 출발하던 날(22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이창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덤덤했다. 물론, 웃으며 인사를 나누긴 했다. 익숙한 사람들과 마주칠 때 두 눈매와 입술이 아주 조금 부드럽게 휘는, 그것이 이창호의 뇌리에 입력된 '미소- 친근감의 표시'. 당대 최고의 승부사라도 타고난 성품이 과묵한 건 어쩔 수 없다. 나이 30을 넘기고도 그는 여전히 승부 이외의 일에 수줍음이 많다.

금강산대국(제48기 국수전 도전3국) 이후 하루를 쉬긴 했지만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아픔이 아니다. 도전무대에 올라 3연패로 밀려난 기록은 정상등극 이래 다섯 번째. 과거에도 없지 않았던 일이긴 하지만 그 세 번이 스승 조훈현과 공동연출했던 전대미문의 사제대쟁기(師弟大爭棋) 중 스승이 우위를 점하던(이창호가 1인자가 아니었던) 시기의 기록이었고 유창혁과 격돌했던 또 한번은 존폐 논란으로 승부욕이 사라진 패왕전(이창호를 3-0으로 뿌리친 유창혁은 결국, 비운의 마지막 패왕이 됐다)의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국수전의 3연패와는 크게 다르다.

성급한 관측자들은 '이창호의 시대가 가고 최철한의 시대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신중한 정통 바둑저널리즘은 여전히 '이창호의 시대'에 무게를 둔다. 외형으로 드러난 기록으로만 보면 '이창호의 시대가 가고 최철한의 시대가 왔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국수전 3연패를 포함한 대 최철한전 8연패(속기전 제외. KBS바둑왕전, 한국바둑리그에선 이창호가 2승)가 그렇고 '기사생애 최악의 신년 스타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1승 5패의 참담한 성적도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5-05-24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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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14. 10:00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

이창호시대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을 꼽으라면 역시 신문, 방송 기자들일 것이다. 대국이 끝나고 무엇을 물어봐도 속시원히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목소리는 언제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전광석화 같은 행마로 천하를 평정해, 팬들을 매료시켰던 스승은 말 한마디 한마디조차 바람처럼 경쾌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승부에서도, 그 뒤의 소감에서도 돌부처와 같았다. 기자들의 푸념은 늘 한결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이거야, 원···”

그러나 사람들은 흙 속에 묻혔던 보석을 찾아내듯, 타고난 조심스러움과 환경에서 비롯된 어눌함 속에 감춰진 그의 미덕(美德)을 찾아냈다. 흙을 털어내고 요란하지 않은 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은, 서두르지 않는 이창호의 바둑에서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만 질주하는 현대사회 구조적 병폐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느림의 철학’을 발견했다. 입단 이후 20년 가까이 일관되게 지속돼온 이창호의 어눌한 언행은 ‘대지(大智)를 품은 대우(大愚)였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저널리스트들은 일제히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맞다. 이창호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일단, 표정이 밝아졌다. 여전히 부족한 듯하지만 예전보다는 웃는 얼굴을 많이 보여준다. 인터뷰의 목소리도 조금 커지고(아직 많이 작지만) 대화중에 전에는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조크가 간간이 섞이고 있다. 대화의 자신감이랄까,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창호는 달라진 것일까?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엄밀히 말하면 이창호가 달라지고 있다기보다 환경이 바뀌고 있으며 이창호는 그 흐름에 맞춰 왔을 뿐이라고 해야 옳다. 다시 말하면 이창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도 환경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속도로 적응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과 다르게 이창호 자신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려운가?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면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변화의 가장 큰 동인(動因)은, 정상의 세대교체다. 오랜 기간 그는 정상그룹에서 가장 어린 기사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최고의 실력자이면서도 그 권위에 어울리는 언행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타이틀전의 상대는 거의가 스승 조훈현이거나 대선배였고 승부는 대부분 그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운 성품을 지닌 그가, 패배의 멍에를 쓴 스승이나 대선배들에게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또 그 면전에서 쉽게 기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2004-04-06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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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13. 16:57


이창호의 성품은 갑각류(甲殼類)

내가 아는 그는 지독히도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그런 듯하고 철이 들기도 전에, 천하가 인정하는 대가(大家) 조훈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데다, 입단 이후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대선배들의 울타리 안에서 홀로 커왔다는 특수한 환경의 영향이 그 성품을 더욱 견고하게 지켜준 것으로 보인다(그가 큰 승부를 끝낸 뒤 그토록 말을 아끼고 어려워한 이유는 그 상대가 대부분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의 뒤를 이어, 바둑사상 두 번째 어린 나이로 프로의 관문을 돌파하고(86년 11세 입단) 그 4년 뒤 최고위전으로부터, 바둑천하를 세 번씩이나 완벽하게 평정했던 위대한 스승의 권위를 허물기 시작했는데 타이틀전선에 뛰어들어 최고의 자리를 향해 질주하던 이 시기에, 의사소통이 수월한 비슷한 세대의 동행을 찾는 일은 불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늘 쟁쟁한 대선배들의 울타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두터운 말문을 트고 속내를 편히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너무도 일찍 자기세대를 초월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겸허함과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영향을 생각하면 그의 성품이, 밝고 활달한 동년배들과는 대단히 이질적인, 때때로 음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갑각류(甲殼類)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각류는 두터운 외피 안에 어떤 류보다 부드러운 속살을 가지고 있다. 이창호는 그런 사람이다.

91년의 기억 한 토막. 당시 이창호와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의 한일신예대표기사대결 5번기는, 한국의 정상과 일본 신인왕의 격돌이라는 점에서 승부결과가 어떻든 한국 쪽에 불리한 미스 매치였다. 이때의 한국바둑은 국제 교류전의 대상자선발에 관한 협의나 의전절차에 꽤 어수룩했던 것 같다.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정상이 신예대표기사라는 딱지를 달고 일본의 신인왕과 겨루는’ 언밸런스한 이벤트를 기획한 사람에게 상당히 분개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이런 관련 기사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진정한 최강자가 되려면 이런 국제시합을 통해 감각과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이런 도전을 피하면 프로의 정당한 자세가 아니라고. 정말이지 그건 미스 매치의 구차한 핑계에 불과하다. 

요다가 도전해온 것이라면 파이트머니를 달리 할 수도 있고, 요다가 도전하는 외양을 갖출 수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이벤트 입안자들이 협상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다. 1인자의 위상을 제대로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그게 할 소린가? 뭐, 이제 와서 지나간 일들을 시시콜콜히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의 일들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른 데 있으니까.

91년 2월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층 아테네가든. 점심 휴식시간이 12시 30분부터 1시 10분까지였으니 12시 50분에서 1시 사이였을 것 같다. 대국장 옆으로 정원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쾌적한 휴게실이 있었는데 막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가 창가에 서서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격전장을 벗어나 승부를 잊고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동시에 ‘15세(15년 7개월) 승부사의 망중한(忙中閑)’이라는 카피도 떠올랐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고 초점을 맞추려는 순간 그가 돌아섰다. 그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의 눈 주위로 물결 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결코 휴식을 방해했다는 노여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2004-04-02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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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1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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