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태호, 술자리에서도 작품을 위한 취재기회가 생기면 종종 이런 모습으로 돌변한다. (원래 인터뷰하려 간 자리가 아니어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곱지 않다.

윤태호, 바둑에 패션을 입히다, 미생 시즌2!
미생 시즌2, 바둑의 실리와 두터움을 세계관에 반영


굳이 인터뷰를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가벼운 술자리라고 하기에, 그들 둘만 마시기엔 가끔 대화가 끊기기도 하고 뭐 그러니까, '너도 따라올래?' 하는 권유에 냉큼 '그들 둘'의 술자리에 합류해버렸다. 

그들 둘 중 하나는 '윤태호'였다, 바둑에 '패션(Fashion)'을 입힌 창작자다. 또 다른 하나는 '손종수'. 윤태호 작가가 미생에서 어떤 패션을 택해야 하는지 많은 조언을 한 사람이며, 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cyberoro.com)의 상무다. 

10월 21일, 오리역 부근 윤태호 작가의 오피스텔에서 그들 둘의 자리에 끼었다. 그동안 미생의 연재가 끝났고, 드라마 미생이 화제를 모았다. 만화작품으로서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들이었다. 이제 '미생2' 연재시작이 얼마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미생 연재 전부터의 오랜 인연이 있으나 최근엔 만남이 뜸했다. 오랫만이니 덕담을 나눈다. 

"윤태호 작가는 바둑에 패션을 입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건 제가 입혔다기보단, 드라마 제작자들이 입힌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 둘은 '우정'을 참 겸손하고 점잖게 나눈다. 한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만화 미생의 등장 이후에 바둑에 대한 선입관이 일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얀 백발과 수염이 치렁치렁한 늙수구레한 산신령이 구름타고 다니는, 다소 고리타분할 수 있는 신선놀음이 바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였으나, 미생 이후 젊고 샤프한 연구생 출신 장그래의 리얼한 삶이 바둑에 투영됐다. 

윤태호 작가는 '미생 시즌2'를 준비하는 동안 5kg이 빠졌다. 원래 큰키는 아니지만 어쩐지 미생1을 연재하던 초창기보다 더 어려지고 귀여워진 것 같다. 나이 든 엽기토끼, 마시마로를 보는 느낌이 들어 참지 못하고 덕담을 던진다. 

"어우, 귀여워지셨는데요. 나이를 거꾸로 드시나봐요." 

"'건강해야한다'는 강박을 요즘은 버리고 산다"는 작가의 대답이 나온다. 곧 작가가 자주 가는 동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생맥주를 시키고 소주를 시키고 안주를 시킨다, 술이 먼저 나오고 안주가 준비되는 적당히 무료한 사이, 윤태호 작가의 질문이 손종수 상무에게 던져졌다. 


▲ 안주를 기다리는 사이, 손종수 상무(왼쪽)에게 윤태호 작가의 질문이 던져졌다. 처음엔 이렇게 테이블 밑에 취재노트를 놓고 마치 잠깐 메모하려는 듯 하더니...


○● 바둑에서의 유미(唯美)주의, 실리와 두터움

윤태호 작가는 '미생2'에서 창업을 한 지 얼만 안된 기업을 소재로 하려 한다. 미생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예고된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기업과 구성원들의 숙명적인 고민을 바둑에서 은유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 개념들은 '실리와 두터움' 그리고 '빠름과 느림' '형식과 형식파괴'에 관한 것들이다. 

- (윤태호) 한국바둑이 가진 공격성, 자유로움이 형식에 치우친 일본바둑의 단조로움을 이겼다는 평가를 내리곤 한다. 그렇다면 일본바둑의 형식미는 현대바둑에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

"(손종수)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대부분 좋은 모양이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바둑에서의 미적 감각은 수많은 고수들이 여러가지 수법을 검증해 확립한 것이다. 물론 정석의 효용은 바뀌며 어떤 정석은 유행을 타기도 하고, 때론 생각하기 힘든 파격적인 신수도 출현한다. 일본바둑이 한국바둑보다 유미주의적이기는 하지만 그 형식미는 기본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에 가능한 것이다." 

소주보다 먼저 나온 500cc 생맥주는 매우 차디차다. 아직 단 한모금도 입술을 적시지 않은 윤태호의 눈빛이 번뜩였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먹잇감을 눈 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 지금 윤태호의 눈빛이다. 붉으스름한 술집 조명이 불씨가 되어 작가의 눈동자에서 불기둥을 일으킨다. 분명하다. 음. 이건 술 먹자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기업에서의 '형식'에 관한 그의 해석이 이어진다. '회사가 들어놓는 보험, 규정과 절차는 때론 비용이고 번거롭기도 하다. 이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고 결국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창업한 회사는 그 비용을 더 빠르게 성장하는 '속도'에 투자하고 싶어한다. 아마도 그 속도에 대한 구성원들의 열망으로 인해 큰 사단이 나고, 장그래는 미생2에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창업한 지 얼마 안된 기업에게, 속도와 두터움의 선택은 본질적인 고민이다. 작품을 보는 사람은 흥미진진하겠지만 만화 속 장그래와 오차장은 아무래도 숨막히는 압박에 시달릴 것 같다.

- (윤태호) 바둑에서의 실리와 두터움, 그것을 기업과 연결시키는 지점을 찾고 있다. 

(손종수) "바둑계엔 '실리는 현금, 두터움은 수표(혹은 어음)'라는 말이 있다. 바둑에서의 실리는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현금에 곧잘 비유된다. 이에 비해 수표(어음)는 부도가 날 수 있다. 현찰로 받을 수 있을 지 없을 지 당장은 알 수 없긴 하지만 받았을 경우 당장의 현찰보다 큰 이익이 되기에 두터움을 택한다. 게다가 승부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조훈현 9단과 제자인 이창호 9단이 실리와 두터움을 상징한다. 속도로 상징되는 조훈현 9단이 실리를 먼저 챙겨가면 이창호 9단은 속도는 느리지만 두터움으로 스승을 넘어섰다." 

더보기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20947

by orobadukad 2015. 11. 2. 11:49


▲ 영화 - 스톤 - 을 감독한 조세래 감독


바둑과 영화를 사랑한 <스톤>의 조세래 감독 스토리 / '씨네21' 장영엽 기자


○● 영화 "스톤" 조세래 감독, 인생과의 전면 승부를 택하다

"언제 내려오셨어요?" 부산영화제 상영관을 오가며 영화계 관계자를 만나면 으레 하는 인사다. 그 인사에 뒤따르는 말도 매년 다르지 않다. "영화는 좀 보셨나요?" 하지만 이건 그냥 하는 질문만은 아니다. 행사와 미팅으로 빠듯한 부산에서의 일정 중에,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서 눈 밝은 영화인들이 관람을 택한 몇 편의 작품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 상영작인 <스톤>도 그렇게 발견한 영화다. 바둑과 조폭이라는 극단의 장르를 결합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인상적이라는 점이 <스톤>을 추천한 이들의 대체적인 관람평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영화에 주목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57살에 첫 장편영화를 연출한 조세래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다. 충무로에 오래 머물던 이들도 현장을 떠날 시기에, '신인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다시 영화판에 복귀한 1980년대 영화인. 바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역수>와 <승부>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어떻게 <스톤>을 만들게 되었을까. 다음은 조세래 감독이 직접 들려준 영화와 바둑, 인생에 대한 긴 이야기다.


▲ 스톤 촬영중, 조세래 감독



종횡으로 교차하는 직선의 줄. 그 줄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검은 돌과 흰 돌의 승부가 13살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바둑이 좋았다. 겉으로는 적막이 감도는 점잖은 경기이지만 바둑판에 돌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정신적으로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이 스포츠에 유년 시절의 조세래 감독은 매료됐다. 하지만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 역시 아들이 먹고살기 힘든 바둑을 업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취미로 바둑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영화가 그의 인생으로 들어왔다.'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를 봤던 사춘기 시절의 어느 날'을 조세래 감독은 잊지 못한다. 부유한 고등학교 동창을 흠모하다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랭 들롱의 모습이 조감독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영화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놀라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직접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 마음을 먹자 모든 것들이 명료해졌다. 시나리오작가를 꿈꾸며 국문과에 지원했고, 국문과를 중퇴한 뒤엔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다녔다.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던 조세래 감독의 모습이다.

장영엽  2013-11-05

더보기 :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T2&num=518591&pageNo=1&cmt_n=0

by orobadukad 2014. 4. 26. 13:22


▲ 2009년 사이버오로 사무실에서 이도윤

'돌부처 이창호'를 움직인 여기자 이도윤

"10월 28일이라고?"

목석같은 느낌을 주는 이창호 9단, 바둑은 1인자이이나 30대 중반이 넘어가도록 연애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한 이창호 9단이 2년간의 뜸을 들인 끝에 한 여인과 평생을 하기로 결심했다. 돌부처를 움직인 여성은 매우 뜻밖에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이도윤 기자였다.

사이버오로(월간바둑 발행) 컨텐츠팀에서 2008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도윤 기자는 기본적으로 밝고 명랑한 사람이다. 신입직원 특유의 헐렁함과 어리숙함으로 주위를 즐겁게 하던 이도윤은 취재대상이었던 이창호 9단까지 매우 즐겁게 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잘 웃지 않던 이창호 9단이 이도윤 기자와 만날때면 자연스럽게 웃었을 것만 같다. 실제로 이도윤과 이창호가 같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이창호 9단이 어찌나 크게 입을 벌리고 웃는 지 놀랐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이창호 9단의 소심한 미소는 매우 유명하다.) - 이도윤 기자가 이 9단과 가까워진 것은 한마디로 '인연'이다. 

(중략)


- 정말 축하합니다. 결혼 발표까지 했는데. 결혼 발표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면? 주위에서 말도 많아 힘들어 했지 않았나요?
" 미리 알려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스스로의 부담이 강했죠.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제가 너무 작아보이기도 하구요. 주위의 시선이나 소문은 제가 견뎌야 하는 거구요."

◀ 2009년 여름, 삼성화재배 개막식을 취재하던 이도윤 

- 처음에는 이창호 9단을 '사범님'(프로기사에 대한 호칭)이라고 불렀잖아요? 언제부터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나요?
"만난지 6개월 정도 지나서일꺼에요. 2009년 초반인거 같아요. 2008년 말 태백산 천제대국을 취재하면서 더 친해지기 시작했어요 "

- 이창호 9단의 어떤 점이 이도윤씨를 움직였나요? 이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는 건데.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거요. 항상 소탈하게 대해줬는데 이게 너무 좋았어요. 끌렸다고 해야 하나요."

- 이창호 9단은 이도윤씨의 어떤 점에 끌렸을까요?
"글쎄말에요. 저도 그게 궁금한데요. 오빠한테 물어봐도 안 가르쳐 줄 거 같애요."

최병준  2010-06-14 

더보기 http://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22&num=514051&pageNo=4&cmt_n=0


by orobadukad 2014. 2. 14. 16:03


▲ LG배 결승과 함께한 윤태호의 토크콘서트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내 나이가 고마웠다." 69년생 만화가 윤태호는 이렇게 말했다.

2월 12일 제18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2국이 열렸던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본관 대강당에서 '未生-살아있지 못한 자'의 작가 윤태호가 바둑팬들과 토크콘서트를 함께했다. 

2007년 '이끼'를 통해 스타웹툰 작가로 떠오른 윤태호는 2012년부터 연재된 '미생'에서 조회 수 1억뷰를 기록했다. 웹툰 '미생'은 책으로도 출판되어 이미 70만 부가 팔렸다. 미생은 바둑을 모티브로 샐러리맨의 삶을 그린 만화다. 바둑만이 인생이었지만, 입단에 실패한 주인공 장그래가 종합상사에서 들어가 겪는 이야기다. 이 웹툰은 실감 나는 리얼한 현실은 바둑팬을 넘어 일반 직장인들의 마음까지 울렸다. 

윤태호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자기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하고, 현실을 제삼자의 관점으로 바라본 이후의 변화는 개개인의 몫이다. 나의 역할은 생생한 중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업 3팀은 직장 내 자신의 지향점이 모여진 판타지다. "라고 말한다. 

박주성  2014-02-12 

더보기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18868

(중략)

직장인의 교과서'라고도 불리는 미생의 취재과정 어떠했을까? 윤태호의 바둑실력은 10급, 직장생활도 없다. 처음에는 회사의 직급체계 중에 부장과 과장 중 어떤 것이 높은지도 몰랐다고 한다. 바둑 관련 취재를 위해서 한국기원을 두세 차례 방문했고, 전문가들을 소개받아 의견을 청취했다. 대기업도 종합상사를 직접 찾아가 각 방면의 조언을 들었다. 

그 많은 취재과정에 앞서 "만약 20대였다면 취재원이 들려준 방대한 이야기들이 피상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약간이나마 사회를 경험한 이 나이에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에 감사했다."라고 말한다. 

윤태호는 미생 시즌2를 기획중이다. 이번에는 대기업 종합상사가 아닌 더 작은 회사의 이야기라고 한다. 바둑이 또 어떻게 내용에 녹아들지는 연재가 시작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 지난 인터뷰 기사 클릭☞ (1)10년의 준비
윤태호 작가의 '미생', 지난 인터뷰 기사 클릭☞ (2)윤태호의 살과 피


▲ 평일 오전임에도 윤태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많은 바둑팬들이 모였다.


토크콘서트의 서두에서 윤태호는 "예전에 소재로 창업, 회계, 내기바둑 같은 걸 준비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그것들은 체험한 것들이 아니고 찾아서 익혀야 했다.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바둑을 소재로 바둑을 다루기로 했는데 어떻게 접근할까 고민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처음엔 스승 허영만의 <타짜>처럼 도박을 다뤄, 내기바둑을 해볼까도 했지만 10급 실력인 자신으로서는 바둑 내용의 세부적인 묘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프로기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프로가 되는 데 실패한 연구생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만화를 통해, 카네기처세술처럼 다른 사람의 분야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 않았다. 주인공은 편견(바둑 한 사람에 사회에 대해 뭘 알겠어 등)에 노출된 인물이다. 이는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 저마다의 모습이다. 그래서 공감을 얻었을 것이라 본다."라고 미생의 최초 기획과정에 대해 밝혔다. 

이후는 바둑 관련 취재를 하면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살펴봤고, 대기업과 요르단 대사관 등을 방문한 뒷이야기를 함께 공유했다. 아래 동영상을 클릭하면 토크콘서트 후반 30분을 윤태호의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윤태호 작가의 토크콘서트 현장영상 보기


by orobadukad 2014. 2. 12. 17:33


▲ (96년) 안소장의 사무실 한켠엔 아직도 대학시절에 바둑대회에 나가 우승상품으로 받은 바둑판이 훈장처럼 자리잡고 있다


유력한 대선후보(
 2012-09-08 현재) 로 거론되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일찍이 바둑마니아로 소문났다. 정치적인 색깔을 떠나, 바둑을 좋아하는 유명인사로서 그의 바둑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바둑팬 또한 안원장의 '바둑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리라. 예전 기사이긴 하지만 [월간바둑]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기사는 바둑에 국한한 내용이었으나 '안철수의 생각' 일단을 살펴볼 면이 있기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 사람의 행마법(96년 11월)
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씨

글/정용진 편집장
사진/이시용기자, 안철수 바이러스연구소 제공


오늘날 지구상의 웬만한 것은 컴퓨터에 정복되었고 또 정복되고 있다. 체스는 이미 세계 최강자와 겨루는 수준에 이르렀고 장기도 머지않아 공략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바둑만큼은 아직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모를까 컴퓨터가 영원히 인간을 이길 수 없는 마지막 분야가 바둑일 것이라고 장담하기까지 한다.

컴퓨터의 두뇌는 0과 1의 이진수 조합으로 구동된다. 그런 의미에서 흑백의 이분법이 가능한 바둑과 유사한 면이 많다. 바둑과 컴퓨터는 지극히 수학적이라는 데에서 한 혈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원시적인 컴퓨터의 형태가 바로 '주판'이라고 일반상식 책에 서술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주판'은 원래 '바둑'에서 변형되어 나온 기구라는 사실을 여럿 고문헌에서 증명하고 있다는 점. 

(중략)

서울대 의과대학 예과 2학년 때 취미활동 개발차원에서 배우기로 작심한 품목이 바둑이었다. 본과에 진학하면 취미활동을 하고 싶어도 할 시간이 없다는 선배의 충고가 계기가 되었다. 정신수양의 의미도 곁들여 바둑을 두면서 어지러운 현실을 이겨볼까 생각한 것이다.

바둑은 사실 책으로 배우고 기원은 심심할 때 갔다. 안소장은 무엇이든 시작할 때 관련서적을 두루 사 이론부터 파고드는 성격이다. 그리고 책에서 배운 내용을 연습한다. 처음에는 행보가 더딜지 모르나 기초이론 무장이 단단하므로 종내에는 다른 사람보다 빠른 효과를 본다. 

바둑도 그랬다. 학기 중엔 청계천 고서점에서, 방학 중엔 고향 부산 구덕운동장 근처 고서점에서 눈에 띄는 바둑책은 죄다 손에 집었다. '월간 바둑'도 그때 만났다. 첫 길잡이가 된 입문서는 오타케(大竹英雄) 九단이 쓴 책이었다. 무작위로 산 책이 50권쯤 될 무렵 어렴풋이나마 모양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은 이때 비로소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10급에게 9점을 깔고도 100집 이상 져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으나 1년 만에 기원급수 2급까지 급행보를 보였다. 그때 기원급수 2급이면 지금 한국기원 심사기준으로 볼 때 아마 1~2단쯤 될 것이다. 당시 부산 한국기원 서면지원의 이기섭 사범이 듣기 좋은 소리로 무릎을 쳤다. 

"아깝다. 어릴 때 배웠으면 조훈현 못지 않을 기재인 것을..."

(중략)

함정수란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속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것 아닙니까. 상대가 함정수를 쓰지 않으면 사실 함정수를 알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함정수와 같은 컴퓨터 바이러스가 계속 출몰하는 한 그것을 찾아 연구하는 것은 저의 몫입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바이러스 퇴치와 같은 소모성 연구보다는 더욱 가치있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더보기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A1&num=517058&pageNo=1&cmt_n=100

by orobadukad 2014. 2. 12. 11:17


▲ 70번 훈련병 조한승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 같다." 

"2%의 부족한 투지를 채워오겠다" 


- 입대 전 '월간『바둑』' 엄민용 기자의 '맛의 발견'코너에 남긴 그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조한승 9단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군생활을 하며 '투지' 를 채우고 있을까? 

봄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토요일 오후, 고된 훈련소 생활과 수색대대 적응훈련을 마치고 첫 외박을 나온 조한승 이병을 만나보았다.

제27보병사단(이기자부대) 수색대대 이등병 조한승

서울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였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넘어 몇 분 안가 조한승 9단이 자대 배치 받은 곳에 도착했다. 화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부대는 얼마 전 GOD의 김태우가 있어 유명세를 탔던 곳이기도 하다.

이기자, 백골, 칠성...마치 조폭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부대명은 춘천 102 보충대에 입대한 '남자'라면 가슴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이름들이다. 2년 군생활의 운명이 결정될 사단배치를 앞두고 '몇 사단이 편하네, 어디를 가면 개고생,'이라는 뜬소문에 가슴 졸이던 그 때가 생생히 기억나실 분도 있을 터이다. (중략)

'한번 하는 것 멋지게 해보자'는 근성 있는 젊은이들이 지원하는 곳이라고. 

" 수색대대는 이기자부대에서도 가장 힘든 곳입니다. 이곳에 와서 1년 정도 되는데 훈련 등으로 정말 지겹도록 걸었습니다." 조 9단을 기다리며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이곳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중략)

훈련소에서도 바둑기사 조한승을 많이 알아보던가요?
“나이대가 거의 21살~ 22살의 어린 나이라 직접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훈련병들의 아버님들이 관심을 가지셔서 몇 마디 물어보는 친구들은 있었죠. 나이 차가 많아서 관심을 받다보니 다들 제가 프로기사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습니다.

바둑을 잘 모르는 훈련병이 대부분이라 '바둑' 자체보다 바둑을 둬서 얼마 버는지, 그걸 더 궁금해 하더군요. 입대 전 GS칼텍스배 우승상금으로 5천만원을 받았다고 하면 다들 굉장히 놀랍니다.”

조한승 9단은 82년생으로 올해 나이가 29 세이다. 일반적으로 육사를 졸업하고 중대장으로 진급하는 나이대가 대략 27세 부근인 걸 감안하면 매우 늙은(?) 이등병인 셈이다. 

▲신병교육대에서

 

신병교육대에서는 소리질러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텐데, 작은 목소리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나요?
"평소에 말하는 어조와는 달라서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만 말하면 되니까요. '다,나,까'로 끝나는 군대식 어투도 이제는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

박주성  2010-03-08 

더보기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22&num=513640&pageNo=4&cmt_n=0



by orobadukad 2014. 2. 7. 12:06




이세돌에 가려졌던 작은 화제?


인터뷰를 하고 나서 인터뷰를 내 보내지 않는다면 당사자들은 몹시 기다리게 마련이다. 일어나지 않아야 좋지만 그러한 일들이 가끔 일어난다. 원래의 인터뷰와 취재는 2009년 6월에 진행됐다. 그러나 2009년 6월이 지나고 7월이 지나고 8월이 지나도, 인터뷰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당시 '이세돌 휴직'이라는 너무나 큰 화제에 살짝 가려졌던 바둑계의 작은 화제는 '차세대기사 리포트'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발간한 주체가 10여명의 프로기사(※2009년 당시의 단위, 백홍석 7단, 온소진 5단, 김지석 5단, 홍기표 4단, 박승화 3단, 이춘규 2단, 이태현 2단, 이현호 2단, 윤찬희 2단, 최병환 2단)였기 때문에 더 눈길을 끌었다. 주 저자는 프로기사들10인과 함께 김대진씨가 한 명 더 있다. 프로기사들에게 연구 장소를 제공해주고, 책을 엮고 골든벨바둑연구회 이름으로 세상에 연구를 내보냈다. 바로 골든벨바둑도장의 김대진 수석사범이다

(중략)

- 작년에 나온 책이다, '차세대기사 리포트'는 공동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지금 도장 공간을 확장했지만, 그 때는 도장운영이 너무 어려웠다.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필요했고, 여러 프로기사들의 협조를 받아 공동연구를 하게 됐다. 그 결과를 출간 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책을 더 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금은 가르치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김정렬 원장님이 제자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다. 
"하하. 어려서부터 아들보다 제자가 우선이었다. 얼마나 사랑으로 가르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김지석, 온소진 등 골든벨 도장에 오는 프로들도 그런 인연이 있다. "

▶ 김대진, 많이 어려웠지만 괜찮다. 이제 시작이다

- 한국기원 연구생 과정을 거친 걸로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같이 공부한 많은 이들이 프로가 됐는데, 아들보다 제자를 더 챙기는 아버지에게 서운한 것은 없었나?
"그런 마음이 조금 있었는데, 다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말씀을 드러내 놓고 못하셨겠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겐 오히려 내가 프로가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지나고 나니 더 긍정적이 됐다. 프로기사였다면 공동연구결과를 책으로 만들 생각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로들보다 사회생활에 더 열심히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

- 도장 운영이 힘들었다고도 전해 들었었는데. 
"한동안은 너무 힘들었었다. 입단자를 한명(류동완) 배출하고 나서도 힘들었다. '차세대기사 리포트'는 그 힘든 시간동안에 나온 결과물이다. 그래서 작업을 함께 한 프로들에게 너무 고맙고 또 미안하다. 프로들은 바둑계에선 일종의 스타다. (같이 한 프로들이 대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 당시에 같이 연구에 참여한 프로들에게 그런 대우를 해주지 못해 스스로 너무 미안했다. "

최병준  2010-03-26 

더보기 :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22&num=513725&pageNo=4&cmt_n=0

by orobadukad 2014. 2. 3. 13:06


▲ 오성수 만평 중 하나, 이창호가 명인전,랭킹1위라는 두마리 토끼를 얻었다, 세번째 토끼는?



'호기심'이란 무엇일까?
단지 '이창호'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바둑만화와 바둑만평을 그리게 된 만화가가 한 명 있다. 무려 4년이상 아무런 보수없이 이창호 9단과 바둑을 그려왔으니까, 호기심이란게 어쩌면 사람을 움직이는 '정열'이나 '재미'같은 것과 본질적으로 통하나보다.

그 만화가의 별칭은 구자식(gajasik)'이며, '오성수'란 이름이 그 주인공의 실명이다. 바둑계와 이창호 팬클럽 '두터미'에선 오성수라는 실명보다 '구자식'이라는 예명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4년이상 '맹(!)'활약하다보니 바둑계 사람들도 그를 많이 알게 됐다. 직접 만나 알게 된 게 아니고, 그의 1컷 만화를 보면서 조금씩 입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중략)

상상력을 중심에 놓은, 관전 9단

- 바둑계의 많은 분들이 구자식 '오성수'화백을 알고 있다. 무척이나오래 이창호 9단을 대상으로 한 만화들을 그렸다. 원고료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텐데, 거의 4년이상(햇수로는 5년이상) 꾸준히 그려왔다. 
"많은 분들이 봐주셔서 감사하다. 내가 좋아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그릴 수 있었다. 초반에는 이창호화 비슷하지 않다고 팬클럽 회원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초기엔 주로 사진을 보고 그렸다. 팬클럽 미팅시 자주 만나보고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이창호 9단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 지금은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금방 그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다거나 하는 댓글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게됐다. 다른 프로기사들은 좀 더 쉽게 그릴 수 있었는데, 이창호는 (특징을 잡아) 그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자리에 동석한 손종수 이사(월간바둑 편집장)의 동감이 이어진다. "그럴거다. 이창호 9단은 특징이 많지는 않은 얼굴이다. 입꼬리가 살짝 처진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오래 보고 이미지를 익히지 않으면, 팬들이 보아온 이창호 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그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유명 프로기사들 그리기는 상대적으로 더 쉬었을 것이다"
오성수 화백은 2006년 팬클럽과의 인터뷰에서 "사범님의 특징을 제일 먼저 살피는데 눈썹이 강렬하시고, 눈은 약간 풀린 듯 하시고^^;, 코는 약간 크시고, 입은 항상 굳게 다무시고..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얼굴 윤곽이었는데, 광대뼈 부분이 포인트인 것 같다.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초기에는 솔직히 (자기의 그림이) 못마땅했는데 그리면서 조금씩 나아진 것 같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 만화는 언제부터, 만화가로서 이름을 알리는 것 자체가 프로기사가 성공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 것도 같다. 경쟁이 무척 치열한 분야 아닌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때부터 계속 그렸다. 부모님이 그림 그리는 걸 반대하진 않으셨기 때문에 만화를 계속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이게 수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직업으로 선택할 땐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취미로 할때와 직업으로 할때는 다른거니까.

최병준  2010-01-01

더보기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22&num=513400&pageNo=4&cmt_n=0

by orobadukad 2014. 2. 2. 13:01


왜 지금 "루소"인가? - 루소 탄생 300주년(2012년)을 앞두고

(중략)

몇 번인가의 만남은 압구정동에 있는 (재)국제평화전략연구원, 혹은 그 주변의 술집에서 고등어회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뤄졌다. 이전부터 여러번 만났지만 항상 막걸리를 마셨기에, 기억이 가물가물한 면이 있다. 자꾸 미루고만 있다가 기억나는 인터뷰를 10월 한가위를 맞아 옮긴다. 한가위를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 출간을 축하드린다. 그동안 하시던 작업이 <<루소사상의 이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어떤 책인가?
"루소를 연구한 여러 해외학자들의 논문을 편역했다. 박사공부를 할 때에 해외논문을 읽으면서 중요한 논문 50여개정도는 한글로 번역을 해놨었다. 그중 16개를 다시 추려 '편역'을 했다. 번역이 아니다. 항상 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다 지금에서야 완성하게 됐다. 돈이 되는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해야 했다. 아내가 몇년째 이 작업을 하는 걸 보고, 얼마나 받느냐고 묻기에 '얼마'했더니 그냥 어이없어 하더라. 인터뷰를 게재하기전 최소한 책에 실린 두편이상의 논문은 읽고 쓰기 바란다. 하하"

- 그러면 좋아하시는 바둑은 별로 못 두셨겠다. 
"음. 평상시에도 바둑에 푹 빠지진 못한다. 다른 일을 해야 하니까. 작업을 하다 머리가 아프면 저단의 ID로 오로바둑에 들어가 한 10~20분정도 초속기 바둑을 둔다. 좀 더 시간을 들여 두는 고단자 ID도 하나 있다. "

▶ 가끔씩 바둑을 즐긴다

- 예전에 오로바둑 동호회 연기바둑을 제안하시고, 주관까지 하셨었는데.
"아, 그건 바둑 베팅 초기에 워낙 말이 많기에 베팅이 없어도 바둑에 즐길만한 주제가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오로바둑에만 있는 독특한 연기바둑이라고 봤다. 베팅이 필요하다면 존재하는 것이지만, 다른 대안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일종의 안티테제랄까. 연기대국의 전망도 밝다. 앞으로 타 스포츠 종목처럼 개인전 외에 복식과 혼합복식 등으로 종목내 메달을 놓고 경기다양화가 이뤄질 것임에 틀림없다."

- '루소'하면 프랑스대혁명前, 그러니까 거의 300년이 다 되가는 계몽주의 사상가인데... 오늘날 우리가 가장 쉽게 그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는 거 그런게 있나?
"많지. 가장 실감할 수 있는게 보통선거지, 설령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살아나도, 세종대왕이 부활해도 그가 가진 참정권은 1표다. 우리 모두와 같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루소지. 너와 나는 모두 동등하게 1표. 일종의 사회계약이지. 요즘에는 "1주(株) 1표"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많아 졌어.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거나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지. 그런 가치관 때문인지 요즘은 '20-80'의 사회를 넘어 '2-98'의 사회로 가는거 같애. "

- 사회가 그렇게 변한다면, 바둑계도 그렇게 되는거 아닌가?
"2-98처럼 간다고 봐야지. 아마도 한국바둑에서 프로가 되는 길은 한국사회의 다른 '대입입시학원'이나 '전문학원'처럼 상당부분 체계화되어 있을 거 같다. 2%가 되는 길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거지. 그렇지만 98%의 사람들을 위한 가치, 그런 생각은 어디서나 어느 분야나 해줘야 하는 거지. 한국기원이 '오픈제'도 도입하고 하는 걸 보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선 한국에서 천재가 나타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게 천재가 쉽게 나타날 수 있는 시스템이지. 그렇다면 그 나머지인 98%도 지금 보다 더 가치있는 뭔가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2%'도 매우 중요하지만, 나머지 98이 건재해야 '2%'그룹도 존재할 수 있거든.

'오로지 이기는 것, 힘이 곧 정의(트라시마쿠스)'로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오래된거고 상당히 현실적인 가치야. 바둑팬들도 그런 관점에 익숙해져 있자나. 그러나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옳은 것이 정의"(정의가 힘, 소크라테스)라는 가치도 필요하거든. 말하자면 시민의식 같은거, 그런 것들이지. 

최병준  2009-10-01  

더보기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22&num=513057&pageNo=4&cmt_n=0

by orobadukad 2014. 1. 28. 11:36



(중략)
“이외수의 복수”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 세상에 보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가? 복수를 주제로 한 어느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아마도 감독이 무시당하고 고독했나 보다, 뭔가 세상에 일을 저지르고 싶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세상의 무시와 버림에 대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복수가 인생의 힘이 되기도 한다. 극복해야 할 대상(일본)을 정해놓고 매진했던 건 한국바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외수 선생의 글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아픔과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결론에선 "복수"의 모습이 잘 없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움의 느낌이라면, 복수를 꿈꿀 수도 있지 않았나?

“왜 없나, ‘들개’에도 세상에 복수를 하려는 주인공이 있다. 내 글을 읽고 감동을 하면 그게 충분한 복수가 된다. 작가의 복수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감동시키면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나를 외롭게 하던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화한다. 그것이 가장 통렬하고 유쾌한 복수다. 
어떤 시대든 그 시대의 현실은 ‘예술의 적‘이 된다. ,작가는 그 현실에 복수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동‘이다. 
내가 멋있게 살면 ‘예술도 글도 한번 해 볼 만하다‘고 사회통념이 변할 수 있지 않겠나. 씨트콤도 나가고, CF도 나가고 했다. MBC에서 하는 라디오방송(언중유쾌)은 대한민국 최초의 ’재택방송‘이자 ’가내수공품‘이다. 죽이지 않나? 누가 그런 걸 할 것인가, 예술에 있어 그런게 내 몫이라고 느낀다. 내가 총대를 메려 한다.“ 

- 친구가 대학시절 선생의 글에 심취했었다. 열렬한 팬이었다고 할까.. 그 친구 말이 선생의 수필을 보며 일제시대 '이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데. 

“초기 활동시기에 ‘이상의 망령’이 되 살아 났다‘ 문단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친구야, 네가 문학소년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 선생의 글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팍팍 후비며 파고든다. 별것도 아닌 평범해 보이는 사물을 아주 자세히 잘 관찰하고, 재밌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그런 능력이 탁월하다. 꿉꿉한 일상에 생명을 집어넣는다. 도대체 그런 감수성, 집요한 상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의도한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만물에 대한 애정이다. 그래야 딴 게 보인다. 그게 없으면 신선한 표현도 없다. 그런 애정이 생활화, 습관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만물에 의도적으로 말을 던지고 대화를 해야 한다. 바위에게 물어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들어라, 사물과의 합일감에 의해서 절묘한 표현이 나오게 된다. 바둑이 도(道)라고도 하지,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도를 닦는 것이다. 바둑에서 (프로가) 착점을 하는 것과 작가가 원고지에 글 한자, 한자를 박아 넣는 것은 같은 것이다.”

- ‘프로의 착점과 예술(문학)이 동등하다’는 의미인데, 프로들이 좋아할 표현인 것 같다. 바둑을 ‘예술의 경지’로 보시는 것인가?

“물론이다. (바둑은) 예술이다. 정말 오묘한 소설이고 시다. 바둑에서 보이는 발상의 비약을 봐라, 착수 하나에서 시적인 경지를 느낀다. 한판을 꾸려가는 그 구성력은 또 어떠한가. 난국을 타개하는 모습은 한편의 기가 막힌 소설이다. 난 바둑을 전투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나는 바둑을 감상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한다.”

최병준  2009-08-24 

더보기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22&num=512921&pageNo=4&cmt_n=0

by orobadukad 2014. 1. 24. 10:08
|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