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휘호. (백년의 일 한바탕 꿈이고 세상풍진 한판의 바둑이다.) 스님은 청나라 황제 순치제의 시를 인용하여 인생 한바탕을 한판 바둑에 비교하셨다.)



1. 역사 속의 바둑 

80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부여 능사리 절터 발굴 조사에서 나온 백제 목간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宿生結業 同生一處.

‘지난 생에 맺은 인연으로 오늘 이곳에서 만났다’는 정도의 글로 7세기 백제인의 문장 구사력과 함께 불교의 윤회론이 잘 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백제의 불교는 웅진시대에 이미 사택지적비를 통해 그 수준과 실심함을 보여 준 바 있다. 사택이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전 재산을 들여 옥으로 만든 탑과 절을 지어 바친다는 비석의 내용은 능사리 목간과 함께 백제의 불교를 충분히 알려준다 할 것이다.

'주서'는 백제에 다탑다사(多塔多寺)라 하고 있다. 주서는 백제에 도사(道士)가 없다고 했다. ‘도사’는 도교의 샤먼(shaman)으로 수당시대 중국에 유행하던 종교다. 주서는 백제에 바둑이 크게 유행한다고 했다. 불교와 바둑이 25사 중의 25사라 평을 받는 주서에 포착된 것은 불교와 바둑이라는 이질적(?)인 문화 인식에 일격을 가하는 기록이다.

한반도의 고대사에 한자와 종이, 불교와 바둑의 동전(東傳)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한 축이다.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넓게 퍼진 이 사류(四流-한자 종이 불교 바둑)의 스펙트럼은 초기 한국문화의 튼실한 기초이자 뿌리라 할 수 있다.

절집 안의 바둑은 경주 분황사지에서 나온 전돌바둑판과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바둑알로 확인된다. 동시에 '원감록'이나 기타 수많은 고승일록과 문인들의 문집에서 절집과 지근에서 지냈던 바둑의 모습은 무궁무진하다. 

고려시대의 승려 원감선사 문집 '원감록'은 바둑의 정치하고 현묘한 내용에 감탄하고 긍정하는 장면을 싣고 있다. 

원감선사의 바둑관은 조선시대에 와 서산, 유정 등 수많은 고승대덕들의 문집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중 한 편인 다송시고(茶松詩稿)는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의 작으로 바둑과 절집의 하모니가 잘 나타난다. '다송시고'는 초의선사로 이어지는 한국 차문화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보정은 솔잎 한 바람과 바둑판 위에 떨어지는 바둑돌 소리에 세상의 온갖 인연을 끊고 '결사'의 마음으로 정진하던 고인들을 사모하고 승부를 떠난 바둑판을 보며 나무를 쪼개어 차를 다리는 최소한의 도략으로 나를 달랜다며 바둑과 차문화를 긍정한다.

이청  201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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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시킴왕국의 17줄 바둑판.


by orobadukad 2014. 5. 7. 14:09


▲ 다산이 제자 황상에게 준 글.


 바둑 두는 정조.

영조대왕 행장에는 영민한 군주 영조가 바둑, 장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은 훤하게 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비인 '사도'는 바둑과 장기에 능통했고 바둑판을 부인 홍씨의 얼굴에 던져 크게 상하게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바둑과 지근 관계였다.

정조는 영조와 사도를 잘 벤치마킹한 군주로 영조의 결벽성과 사도의 과격성을 잘 아우른 점을 바둑에서도 보여준다. 정조는 "나는 바둑을 잘두지 못한다"고 홍재전서에 토로했다. 바둑을 잘두지 못한다는 말은 바둑을 아주 못둔다는 말이 아니라 잘두지 못한다는 의미다. 정조는 홍재전서에 바둑을 의미 있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기예(技藝)를 잘 모른다. 바둑은 옛날부터 있었던 문방아기(文房雅技)인 데도 나는 잘 모른다. 두지를 않아 못두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재주가 없어 그렇다.'

더보기 http://cyberoro.com/column/column_view.oro?column_no=13807&group=38

2014-01-30 이청 


by orobadukad 2014. 1. 30. 20:25



▲ 눈 내린 서산 서광사. 이곳에서 바둑 템플스테이가 열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바둑론(論)에 도전했던 사람을 손꼽으라면 이덕무, 정원용, 최남선 정도가 아닌가 한다. 바둑의 역사가 오래이고 기예(技藝)의 하나로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해도 바둑의 근본을 묻는 질문은 드물었다.

이런 점에서 이덕무의 '박혁론'은 실로 보석 같은 자료다. 이덕무는 평생을 업으로 많은 글을 썼다. 그의 관심은 박람(博覽)이어 세상의 온갖 것들을 탐색했다. 바둑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예 논(論)이란 독립의 장으로 예리하고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덕무의 박혁론은 1970년 민족문화추진회의 주도로 국역이 된 바 있다. 역자는 최완수다. 박혁론은 원고 15매 분량의 소략한 것으로 몇몇 바둑 필자들의 소개로 바둑계에도 알려졌다. 물론 원문의 대조나 검토작업 없는 정보제공 수준이다. 

박혁론의 주장은 간단하다.

바둑은 예가 아니다. 바둑은 요임금이 만들지 않았다. 바둑은 배울 점도 없다. 바둑은 백성의 생업을 망칠 정도로 중독성이 강하다. 바둑은 유학의 적인 노자나 장자와 같은 이단이다. 나는 바둑을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더보기 : http://www.cyberoro.com/column/column_view.oro?column_no=13784&group=38 

2014-01-13  이청

by orobadukad 2014. 1. 14. 10:48


▲ '아마국수' 박성균 7단의 소개로 보게 된 조선시대 순장바둑판. 필자
가 지금껏 접한 그 어떤 순장바둑판보다 상태가 좋았고, 그 무엇보다
화려하기 그지없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감히 말하거니와, 백제 의자왕
이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정창원 바둑판에 못지 않았다.

(중략)

바둑판에 사용된 거북껍데기는 야기라 부르는 아랍산 거북등껍데기, 즉 대모를 사용했다. 대모는 신라시대부터 궁중 사치품의 최고 품목으로 '인도 침향, 아랍 대모'라 할 정도로 귀하고 고가인 재료다. 이 재료로 바둑판을 치장하고 은사입사(銀絲入絲)를 한 점이 돋보인다.


시대를 측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용의 발톱이 일곱 개인 것이서 고종시대 제작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일곱 개의 용발톱은 중국황제의 전유물이었던 역사적 맥락을 헤아리면(사대하던 나라에서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조선에서 황제로 등극한 분이 고종임금이었으니 그때로 추정된다. 시기는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쯤 아닐까 한다.

2014-01-03 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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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badukad 2014. 1. 1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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